도시농부들

철원에서 보낸 1박2일

아메바!(김충기) 2025. 6. 2. 17:05

철원에서 보낸 1박2일

김보혜(인천도시농업네트워크 이사)

 

DMZ는 영화 공동경비구역이 흥행을 했던 때, 영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는 점 말고는 한 번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곳이다. 그래서 이번 통일논 모내기 행사는 나에게 DMZ와 철원 그리고 남과 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의 현실에 시선을 두고 바라보게 된 또 다른 전환의 기회가 되었다.

 

사실 1박 2일 모내기는 내게 시간적으로 부담이었다. 2주 후에 있을 학위논문 발표일에 준비 기한을 넘겨, 발표를 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를 아슬아슬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리 할 일을 마치고 발걸음을 가벼이 해야 마땅할 것을, 우리의 삶이 어디 그리 깔끔하게 살아지던가(물론 나만의 핑계일수도...). 여튼 인생이란 그런거지라며 자위적 심정으로 짐 속에 무거운 노트북을 밀어 넣었다.

 

이번 행사에서 나의 역할은 선배. 도시농업 전문가과정에서 공부하고 있는 수강생들에게 선배의 역할을 하는 것이 부여받은 임무였다. 그러나... 실상 나의 처지는 공부하고 있는 수강생들보다 나을 게 없다는 부담이 하나 더 있으나, 그것도 나의 발목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나는 무거운 짐과 무거운 마음으로 철원으로 향했다.

 

첫 번째 방문지는 소이산 전망대

전망대를 오르는 길은 요즘 관광지의 트랜드를 담은 듯 과거의 상점과 거리를 재현해 놓은 광장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도로를 사이에 두고 지나난 분단의 흔적을 말없이 간직한, 지금은 폐허가 된 옛 ‘노동당사’건물이 광장의 풍경과 어울리지 않게 소이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밝음과 어두움이 경계를 두고 마주하고 있는 듯. 우리 20명 남짓한 일행은 일단 밝은 기운을 찾아 소이산 모노레일에 탑승하고 소이산 전망대로 올랐다. 물론 걸어서도 가능한 코스라고 했다.

 

소이산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여느 산자락 혹은 농지의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먼저 너른 평야의 논은 반듯한 각이 없었다. 굽이 돌아 나의 경계와 너의 경계가 조화롭게 구획된 다랑이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모든 논의 경계가 곡선이었으며, 그 조각들이 너무 큰 것도 너무 작은 것도 없이 알맞게 분배되어 있었다. 그리고 평야는 화산 분화로 인한 화강암 지대라는 점. 역사적으로 이곳이 한국전쟁의 치열한 고지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감정을 갖게 했다. 그리고 멀리 손에 잡힐 것도 같은 북쪽 지역의 산야가 여전히 우리의 모순과 아이러니한 상황을 현실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역사의 한 조각을 해설사의 거친 숨소리와 목청 높여 울부짖는 사적 견해가 농후한 해설을 듣고 단체 사진을 한 장 남기고 소이산을 내려왔다. 오른 산도 없이 때를 맞춘 시장기에 민망하지만, 고픈 배를 안고 인근 식당에서 청국장과 두부를 재료로 한 점심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향했다. 철원으로 가는 길목에는 군인 초소가 있고 신분 확인을 받는 절차가 있으니 방문객은 자신의 신분을 확인해 줄 서류를 꼭 지참하도록...

 

이번 방문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으니, 물론 나의 목적이 아닌 주체측의 목적, 전문가 과정 수업이 이곳에서 진행된다는 점이었다. 두 강의는 학교 논에 대한 것이 하나, 철원 농민의 상황을 미리 짐작해 보는 게 다른 하나였다.

 

첫 강의는 열정적이며 감동의 시간 있었다. 학교 논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슬라이드와 여러 강사들의 계절마다 펼쳐진 활동이 담긴 이야기는 따뜻하고 뜻깊었다. 또한 이어서 진행한 생태놀이를 재미나게 참여할 수 있는 마음을 열어주었다. 보탠 것은 없지만 감동을 함께 나눌 수 있어서 너무나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강의는 농촌·농민의 현실에 대한 감수성(?)을 가져보는 시간이었다. 이것은 다음날 있을 철원농민(회)와의 만남을 준비하는 워밍업 같은 시간이었다. 그때도 느꼈고 다음날 모내기와 철원농민(회)와의 만남에서도 그렇듯 우리의 생각의 지평을 넓혀준 퍼실러테이터의 역할을 톡톡히 해준 필수적인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농민가를 부르기가 어색하고 만남의 의미가 아리송할 때, 우리는 서로의 관심사를 나누고 새로운 의미를 상상해 낼 수 있었으니 억지스러울 것이 없이 동화되고 공감을 만들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 강의와 강의 사이 저녁 식사가 있었다는 걸 이쯤 적어 넣어도 누구에게도 비난받지 않겠지..^^ 강의와 강의 사이 과식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만큼 맛난 저녁 식사가 있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는 조이와 한탄강 강둑을 짧게 산책했다. 조이와 함께.. 조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탄강의 흐름과 우리의 발걸음의 속도를 같게 맞추고.. 그 순간이 사랑이 피어나는 순간이라고 나는 감히 의미짓고 싶다. 알게 되면 모두 사랑하게 된다는 누군가의 말은 진리이다. 삶을 듣고, 삶을 알고, 삶을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

 

뒷풀이 시간, 밤이 깊어가지 않게 그 끈을 잡고 싶을 만큼 많이 웃었고 즐거웠다.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의 다양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은 거침이 없이 서로의 웃음 소리에 묻혀 신이 나 있었다. 이렇게 각이 없는 치열함이란.. 4개 팀 대항으로 하는 조별 게임은 양보란 개가 풀을 뜯어 먹을 소리라고.. 뒤풀이 설거지! 그것을 걸고 벌이는 피 터지는 결투의 시간이었다. 우리는 거리낌 없이 마음껏 몸을 뒤로 젖히며 웃고 또 웃었다. 그리고 술자리에서 더욱 많이 웃었다. 비록 나는 동시 합창으로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의 주역이 되지 못하고 무겁게 들고 간 노트북을 꺼내 밀린 과제에 감기는 눈을 부릅뜨며 버티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하루가 곁에 와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즐거운 하루를 마감하고 있었다.

 

통일논으로 가는 날

이튿날, 겸재 정선의 화폭에 담긴 빼어난 절경은 일제 식민지와 분단의 상처로 그 의미를 퇴색했지만, 그래도 우리에는 담아낼 가슴이 있으니 그 자리 섰다. 끊어진 철길 위에서 ‘저 초소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니 사진은 가급적 반대 방향으로만 찍어주시고’, 또 ‘저 멀리 북쪽 지역에서는 의정부까지 보이니 북에서도 우리를 보고 있을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며 추스러야할 감정이 크지도 작지도 않은데 들리는 이야기만이 무겁게, 우리는 길지 않은 철길 위를 걸으며 아침 산책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또 적당한 곳을 잡아 단체 사진을 찍었다. 아침 산책의 갈무리.

 

드디어 논으로 갈 시간. 통일논으로 가기 위한 채비를 하고 숙소를 정리하고 논으로 가는 버스는 출발했다. 이번 행사는 우리 단체만 참가한 것이 아니었다. 춘천에서도, 또 다른 시민단체에서도 함께 하여 참여 인원이 50여명이 넘었다. 아이들도 여럿 있었다. 어린 동지들은 부모에 손에 이끌려 이곳에 왔지만, 금새 낯선 이곳에 적응할 수 있기를..

 

나는 논으로 들어가는 게 어색했다. 신발을 벗고 양말까지 벗어둔 채 맨발로 풀을 밟고 서 있는 것이 민망했다. 그래서 논으로 가장 늦게 누군가의 손이 나를 밀어, 논에 빠져들다 싶게 떠밀려 논물에 발을 담갔다. 사물놀이의 풍악이 고요한 철원의 공간을 울렸다. 시끄러운 가락과 기관총을 메고 눈 밑까지 마스크를 쓴 군인들의 감시가 함께 있었다. 그러나 그것에 감정을 느낄 새도 없이 넘어가는 못줄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생애 첫 모내기를 해 보았다. 하루가 지나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 그 촉감과 여리지만 힘 있게 곳게 자란 모의 초록빛이 선연하다. 못줄에 가장 가깝게 있던 나는 못줄을 뺄 때마다 논물이 나의 얼굴과 옷으로 튀었다. 그러나 피할 수도 닦아낼 수도 없었다. 농주도 오고갔다. 그리고 논 가장자리에 있는 내게 첫 잔이 돌아올 수 밖에.. 한 잔 가득 담긴 막걸리 잔을 한 두 모금 나눠 마실 수도 없었고 그저 숨 한 번 크게 들이키고 단숨에 한 잔을 비우기를 서너 번 하고 나니 이미 몸이 술에 젖어있었다. 모든 것이 나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 없었고 그저 건너받은 기운과 손길에 이끌려 나는 철원, 분단의 공간과 시간이 농후한 그곳에 서 있었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서너 명이 트럭을 타고 가야 했고 논에 물 대는 농수로에 몸을 씻고 점심 찬을 들었다. 이렇게 우리는 또 하나의 단체 사진을 남기고 그날의 모내기를 마감했다. 그리고 다시 소이산을 오르던 ‘노동당사’가 있는 곳으로 갔다. 지난밤 강의 속에서 가상으로 우리의 지평을 넓혔던 그 장본인 철원농민(회)와의 눈맞춤을 위해..

 

그곳에서 우리는 어느 자료에서도 볼 수 없는 생생한 구술로 전해 오는 이야기를 들었다.

노동당사를 처음 보게 되면 속이 비어있는 빈약함에도 그 건물의 양식이 서양적임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그 건축 양식은 러시아식 건축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노동당사가 세워진 해는 1945년, 당시 해방을 맞을 때는 8월이며 조생종이 자라는 철원의 벼의 특성상 그제 막 이삭이 고개를 떨구기 시작할 때라고 했다. 일제 강점 30여년 간 철원지역에서 생산되는 쌀은 모두 일본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철원지역 농민들은 고개를 떨구기 시작하는 벼를 보며 체념의 시간을 보낼 때 해방을 맞이한 것이다. 그리고 일제가 퇴거하고 드디어 자신들의 논에서 수확한 쌀이 모두 자신들의 것이 되는 기쁨을 맛보게 된 것이다. 그러한 절차를 처리하기 위해 노동당사가 농민들에 의해 그들의 손으로 직접 세워졌다고 했다. 철원 지역은 한반도의 가운데 즈음 위치해 있고, 철길이 일찍이 만들어진 요충의 지역이라는 점도 상기해 보면, 노동당사의 위상이 제법 높았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환희도 잠시 우리는 한국전쟁의 피폐한 역사가 시작되니 이 노동당사에는 우리 역사의 질퍽한 이념의 핏자국이 고스란히 스며들게 된다. 북쪽 지역이었을 때와 남쪽 지역이었을 때의 엇갈린 운명이 지금 속이 휜히 보이는, 그러나 미군의 폭격에도 무너질 수 없었던 우리의 존재감을 간직한 채 남아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그곳에서 농민의 입을 통해 전해 들었다. 가슴 깊이 파고드는 감정과 함께. 이야기를 전한 그는 담담했지만 듣고 있는 나는 그 담담함을 쫓아갈 수 없었다. 나에겐 그런 내공이 없다. 그리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철원쌀로 직접 빚은 막걸리를 다시 몸에 부었다. 그렇게 하면 그 시간을 알 수 있을까..

 

많은 웃음과 많은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또 나의 일상으로 왔다.

그러나 추천!! 철원 통일논 모내기!! 발을 담가 보길 바란다. 모판을 손에 쥐어 보길 바란다. 질퍽한 논흙에 밀어 꽂듯 서너가닥의 모를 심으라는 농민의 목소리를 들어보길 바란다. 그 모든 것이 나를 살리는 것들이니..

 

2025.6.1. 지난 시간 들이킨 막걸리만큼만 자란 나의 감정들을 적어본다. 그리고 또 다음에 들이킬 막걸리를 기다리며..

첫 손모내기를 철원 민통선에서 해본 필자(김보혜 이사)

 

반응형